첫째 날 - 마랑구 게이트 앞에 서다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산행 첫날부터 비와 함께 시작하는가 싶으니까 조금은 심란하다. 바람도 제법 인다. 그럼에도 호텔 로비에는 일찍부터 사파리를 떠나는 여행객들로 부산하다.
“우리도 떠나야지, 킬리만자로, 오케이?” 아내가 “물론!”이라며 활짝 웃는다.
등반 가이드와 포터, 요리사와 미팅. 한 팀에 가이드 한명과 1인당 포터, 요리사 각각 1명씩을 동행해야만 등반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 부부가 데리고 가는 인원은 자그마치 5명이다. 우리는 원정대를 끌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러 가는 사람들처럼 사뭇 비장해진다.
사실 떠날 때는 약간 갈등을 했다. 떠나기 전날 계명대 산악회장이 히말라야 5,500미터에서 내려오다가 고산병으로 끝내 세상을 등졌다는 비보는 우리 부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킬리만자로는 5,895미터. 우리는 그처럼 전문 산악인도 아니다.
가이드 필립이 무조건 너희들은 성공할 수 있다며 격려해 준다. 대신 걷는 속도는 무조건 가이드에게 맞출 것, 하루에 꼭 물 3리터 이상을 마실 것,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된단다. 필립이 Moshi에서 미네랄워터 1.5리터짜리 4병을 사게 하더니 2병씩 나누어 주면서 하루에 꼭 마셔야 할 양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마랑구 게이트, 해발 1900미터. 필립이 수속을 밟는 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그때 한 서양 청년의 눈과 마주친다. 그의 몸에서 흥분이 펄펄 날리는 것 같다. 얼른 우리 쪽으로 달려온 그가 “난 성공했어. 저 위에 엄청 추워.” 하며 호들갑을 떤다.
드디어 출발, 완만한 경사가 계속 이어지며 이마와 등허리에 땀이 흐른다.
2시간쯤 걸었을까, 포터들이 도시락을 나눠준다. 비닐봉지에 토스트와 삶은 계란, 바나나, 닭다리가 한 개씩 들어 있다. 눈치를 보니 점심은 이런 식으로 제공되는 것 같다.
만다라 산장 2,700미터. 공동식당을 겸한 메인 산장을 중심으로 방갈로 같은 숙소가 널려 있다. 포터가 갖다 준 더운 물로 대충 씻고 식당으로 가보니 동양인은 우리 부부뿐이다. 요리사가 벌써 식탁 하나에 식탁보까지 깔고 커피와 홍차, 코코아 등을 준비해 기다리고 있다. 이런 호강이라니, 무거운 짐들을 짊어지고 올라온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슬리핑백에서 자는 잠은 썩 편안치 않다. 옷을 다 입었지만 팔을 내놓을 수 없을 만큼 밤공기가 차다.
둘째 날 - 호롬보 산장을 향하여
아침 6시부터 포터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식사와 씻을 물, 차를 준비하고, 한쪽에서는 떠날 짐을 꾸리고. 산자락을 빗겨 청명한 아침햇살이 열린다. 오늘 산행거리는 14km.
해발 3000m까지는 울창한 밀림이 이어진다. 나무에 수염처럼 날리는 이끼가 인상적이다. 30분쯤 걸으니 발 아래로 구름이 보이고, 불쑥 두 개의 산이 나타난다. 킬리만자로와 마웬지(5,120m). 킬리만자로는 말 그대로 만년설로 눈부시게 빛나는 산이었다. 암벽으로 이루어진 마웬지는 아무나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처럼 한눈에도 험악해 보인다. 필립도 딱 한 번 그곳에 올랐단다.
이제 열대수림은 저 발밑에 있고 키 낮은 침엽수와 선인장들이 이어진다. 필립은 계속 물을 권한다. 소변을 자주 봐야 한다며 간이화장실이 준비되지 않은 곳이라도 으슥한 데면 일단 멈추고 본다. 남자들이야 그렇더라도 아내가 아주 곤욕스러워한다.
일반적으로 3000m 이상이면 고산증세가 나타난다고 한다. 갈수록 눈앞에 펼쳐지는 전경이 황량하다. 불어오는 바람마저 상당히 차가워 을씨년스럽다. 생전 처음 보는 고산식물들과 강렬한 태양, 갑자기 숙연한 기분이 든다. 하고많은 여행지들을 두고 우리 부부는 왜 하필 이곳에 왔는가. 약간의 호흡곤란이 그런 기분을 더욱 부추긴다. 샌드위치 두 쪽(그나마 배낭 속에서 뒹굴어 부서진)과 오렌지 한 알을 점심으로 먹으며 조금은 한심하다는 생각도 한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오다가 우리 옆에서 휴식을 취한다. 6명중 3명만이 정상에 성공했다고 한다. 누가 성공했고 실패했는지는 얼굴 표정만으로 짐작된다.
드디어 호롬보 산장. 3,780m. 아내가 두통과 열을 호소한다. 나 또한 그렇다. 필립이 메스껍지는 않느냐고 걱정한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우리는 배낭을 뒤져 아스피린을 찾아 먹는다. 조금만 움직여도 호흡이 가쁘다. 내일, 모레를 견뎌야 하는데, 아내가 걱정스럽다. 계곡을 타고 올라온 드센 바람이 가슴팍을 후비어 판다. 오슬오슬 춥기까지 하다.
저녁때가 되어 나와 보니 안개구름이 무서운 기세로 몰려들고 있다. 독수리처럼 크고 검은 새들의 날갯짓이 휙휙 귓가에 바람을 일으키는 것 같다. 식당 안은 정상을 성공리에 오른 자들의 무용담으로 온통 북새통이다.
저녁 식사에 준비해 간 김치를 몇 쪽 먹었더니 머리와 미간이 확 깨이는 것 같다.
셋째 날 - 마지막 산장과 우후루 피크
간밤의 바람은 많이 잦아들었다. 우리를 반기는 것은 여명에 빛을 발하는 킬리만자로. 만년설이 덮인 정상 부근이 정말 발광체 같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바람이 거세어진다. 스틱을 내딛을 때마다 휘청거림이 느껴질 정도이다. 마지막 산장으로 가는 동안의 정경은 마치 사막을 걷는 것 같다. 막막하게 경사진 벌판에 드문드문 푸석한 화산석과 풀포기만 보일 뿐이다. 바람 속을 아내와 나, 필립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 말없이 걷고 있다. 대부분 다른 일행들도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포터들도 제 각각 묵묵히 간다. 출발할 때 아스피린을 먹어서인지 두통은 견딜 만하다.
키보 산장. 4,700m. 필립이 일찍 저녁을 먹고 잠깐 눈을 붙이라고 한다. 자정 전에 출발할 거라고 한다. 키보 산장에서는 토론토에서 왔다는 두 친구와 파리, 뉴욕에서 각각 혼자 온 일행과 우리 부부가 같은 방을 배정받는다. 너무 힘들어 해서 모두 불쌍하게 보인다. 오늘 저녁은 김치와 컵라면으로 지친 몸을 위로하기로 한다. 아내와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바람에 날려갈 것 같다. 아내는 몇 발짝 걸음을 뗄 때마다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쉰다. 아내의 가슴에 손을 대보니 심장박동이 장난이 아니다. 슬그머니 겁이 난다.
킴티가 차려준 차와 비스킷을 한 조각 먹고 야간산행 시작.
윌리암이 보조가이드로 따라붙는다. 꿈길을 걷는 것 같은 산행이 이어진다. 오로지 헤드랜턴의 불빛과 필립의 안내에 따라 걷는 걸음. 화산재 같은 흙은 발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바로 눈앞 능선에 북두칠성이 걸려 있지만 아무리 걸어도 그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가파른 경사면에 두세 개의 랜턴 빛이 반짝인다. 오르면 오를수록 모시 타운의 불빛이 아득하다. 검은 것은 바위이고 흰 것은 만년설이다. 필립이 그 눈덩이를 깨뜨려 보여준다. 그것을 만지려고 하자 그가 손이 시리다면서 안 된다고 펄쩍 말린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 더 걷자 손끝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아 아내와 나는 스틱을 필립과 윌리암에게 맡기고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다.
필립은 수시로 우리에게 물을 마시라고 시킨다. 어느새 펫트병의 물은 얼음이 서걱거린다. 우리는 얼음을 우걱우걱 씹어 먹는다. 몇 걸음 오래 떼어놓을 수가 없다. 심장박동은 격렬하고 숨은 목젖까지 차올라 호흡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럽다. 거기에 감각이 무뎌지면서 어지럼증이 일어난다. 저도 모르게 휘청 넘어질 뻔한다. 그 바람에 뒤에서 쫓아오는 윌리암이 필립에게 혼난다. 사실 여기서 발을 헛디디면 끝장이다. 혼난 윌리암이 내가 휘청거릴 때마다 나를 얼른 부축한다. 그에게 미안하다. 아내는 필립이 보살피고 있다.
겨우 길만 포인트에 도착. 5,681m. 필립과 윌리암이 우리 부부를 껴안고 축하해준다. 파리에서 온 청년도 저도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우리를 축하한다. 아, 그러나 정상이 남아 있지 않은가. 우리는 뜨거운 차를 마시고 다시 출발한다. 너무 추워서 오래 휴식할 수도 없다.
정상에 가기 전에 해가 떠 버린다. 능선인지 지평선인지 구름인지에서 희붐하게 빛살이 열리며 주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여명 안으로 만년설이 드러나고 그제야 발밑의 눈밭도 눈에 들어온다. 발이 걷는지 스틱을 짚은 손이 걷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비몽사몽, 무념무상. 가쁜 호흡을 겨우겨우 달래가며 발을 떼지만 너무 힘들어 울음이라도 쏟을 것 같다. 이제는 아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죽지 않으면 저대로 잘 가겠지. 아내가 이런 마음을 알아도 할 수 없다. 정상은 이사라도 간 것인지 영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드디어, 드디어, 우후르 피크, 5,895m!
나는 표지판에 앞에 앉아 눈물을 글썽인다. 감동이나 감격이 아니라 오로지 힘들어서이다. 끝 모를 정적과 빙벽만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내 옆에 주저앉은 아내는 아예 펑펑 소리 내어 운다. 그래, 실컷 울어라. 그 동안 나와 살면서 괴로웠던 일들 있으면 다 날려버려라. 나는 아내의 등을 투덕거려준다. 필립이 내 배낭에 있던 태극기를 빼내 정상 표지판 기둥에 꽂아 놓는다.
오! 필승 코리아~~~ 기특한 자신과 아내에게 무한한 사랑을 보내노라.
생생한 여행기를 읽으니... 그 곳을 직접 다녀온 느낌이 듭니다.
아내의 등을 토닥이며
"다 날려 버려라"
라고 한 말 가슴에 와 닿습니다.^^